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수/실존 여부 (문단 편집) === 요세푸스의 기록 ===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37~c.100)의 저서 『유대인 고대사』(The Antiquities of the Jews)에 다음과 같은 두개의 기록이 있다. >황제는 베스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알비누스를 유대인 행정관으로 파견하였다. 한편 아그립바 왕은 요셉을 [[대제사장]]에서 해임시키고 아나누스의 아들인 같은 이름을 가진 아나누스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사실 그의 부친인 늙은 아나누스는 많은 행운을 누렸다고 사람들은 말하였다. 그에게는 아들이 다섯 있었는데 그들이 모두 대제사장에 올랐고, 그 자신도 오랫동안 대제사장의 명예를 누렸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다른 대제사장들 에게는 없었던 일이다. 그런데 아들 아나누스의 성격은 오만하였으며 몹시 무례하였다. 그는 내가 이미 지적한 것처럼 모든 유대인들 중에서 가장 엄격한 심판을 내리는 사두가이파를 추종하였다. 아나누스는 베스도가 죽고 알비누스 신임 행정관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권위를 행사할 적절한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산헤드린을 소집하여 그리스도라고 불리우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와 다른 몇 명을 소환하였다. 그는 율법을 어긴 혐의로 그들을 고발하고 돌로 쳐죽이도록 보냈다. 그러나 예루살렘 시민들 중 가장 공평하고 율법위반을 불안하게 생각하던 사람들은 아나누스가 행한 일을 싫어했다. 그들은 아나누스가 그런 행동을 못하게 명령하도록 요구하기 위해 왕에게 은밀히 사람을 보내었다. 왜냐하면 아나누스가 부당하게 행동한 것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오는 알비누스를 만나러 갔고, 그에게 아나누스가 허락 없이 산헤드린을 소집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알렸다. 그들의 말을 듣고 알비누스는 몹시 화가 나서 아나누스에게 문책할 것이라는 서신을 보냈다. 그리고 아그립바 왕은 아나누스를 대제사장에서 3개월 만에 해임시키고 댐네우스의 아들 예수를 후임 대제사장로 임명하였다 >---- >―『유대인 고대사』, 20, 199-203 다음은 이 문단에 대한 의혹이다. 1) 요세푸스는 유대인의 역사에 대한 수십 권의 책을 쓰고, 그 속에서 메시아[* 잘 알려졌듯이 그리스도란 메시아의 그리스어 번역으로서, 예수를 위한 독창적인 호칭이 아니라 기원전에 쓰인 70인역(구약의 그리스어판)에서 이미 40번 정도 사용된 표현이다.]와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단 한 번도 메시아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의 메시아 사상이 바로 로마를 상대로 한 반란의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요세푸스 본인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말하면서도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가장 큰 원인은 그들의 신성한 저술에서 발견되는 모호한 신탁 때문이었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메시아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철저히 피했다.]그렇기에 입장상 로마 제국의 감수성에 불쾌함을 줄 수 있는 모든 표현을 피했던 요세푸스는, 메시아를 언급해야 하는 모든 순간 어떠한 상황에서도 메시아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요세푸스가 로마로 투항해서 쓴 모든 기록을 통틀어서 오직 예수에게만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는 요세푸스가 썼다고 보기는 어려운 기록이다. 2) 한편, 이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라는 표현은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메시아라고 부른다."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중립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당대에 예수라는 이름은 매우 흔했기 때문에, 해당 표현이 그저 어느 예수를 말하는지 식별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닌가하는 견해를 제시할 수 있다. 그런데 요세푸스는 이미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가 유대인들의 진정한 메시아라고 선언했다.[* 진정한 메시아를 선언하는 순간에도 "유대인들의 모호한 신탁은 베스파시아누스 정부를 통해 분명히 나타납니다."라고 묘사했을 뿐 메시아라는 표현을 철저히 피했다.]그러므로 그것은 잘못하면 로마 황제와 갈리리 시골 출신의 한 컬트 지도자가 메시아를 두고 경쟁하는 라이벌 관계로 비춰질 수 있는 표현이다. 즉 그것은 말 할 것 같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반역죄의 가능성 마저 존재한다. 요세푸스는 고작 예수가 어느 예수를 말하는지 식별하겠다는 이유로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을 것이다. 3) 야고보에 대한 기록은 기독교 교부 오리게네스가 언급하기 전까지 약 150년 동안 마치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기독교인 누구에게서도 언급되지 않았다. 보통 기독교인들은 이런식의 침묵에 대해 "그것은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반박하곤 하지만, 요세푸스가 인용되기 전부터 기독교 교부들은 야고보의 죽음이 예루살렘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했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헤게시푸스)요세푸스의 기록을 처음으로 언급한 [[오리게네스]] 역시 정확히 그것을 말 하기 위해 요세푸스의 기록을 언급한 것이며, 오리게네스 이후 [[에우세비우스]], 제롬 역시 같은 주장을 했다. 즉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 주장을 좋아한다. 그들은 야고보의 처형을 말하는 비기독교인 역사가의 기록에 관심을 보일만 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4) 기독교 측에서는 오리게네스가 요세푸스의 기록을 언급하기 전까지, 야고보가 ad62년경 아나누스의 불법 재판으로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 대신 전혀 다른 시기에(ad69년경) 전혀 다른 과정으로 순교한 야고보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존재했을 뿐이다. 헤게시푸스가 기록한 야고보 순교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모든 이로부터 의인이라 불리운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사도들로부터 교회를 전해 받았다. 그는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거룩하였다. 그는 포도주나 발효 음료를 마시지 않았고, 생명이 있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 얼굴에 면도도 하지 않았고, 기름을 바르지도 않았고, 목욕도 하지 않았다. 오직 야고보만이 성소에 들어갈 자격이 있었다. 그는 홀로 성전에 들어가는 습관이 있었는데 종종 무릎을 꿇고 백성들을 위해 용서를 간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처럼 쉬지 않고 백성들을 위해 무릎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기 때문에 그의 무릎은 마치 낙타의 발처럼 딱딱해졌다. 그의 위대한 거룩함에 의해, 그는 예언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의인이요 오블리아라고 불리었다. 오블리아란 그리스어로 “백성의 요새”와 “정의”를 뜻한다. 일곱 분파의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이 와서 그에게 예수께 이르는 길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그분이 구세주라는 사실이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을 듣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었지만, 일부 유대인들은 부활, 그리고 장차 그가 모든 사람들의 공로에 따라 상급을 주러 오신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과 통치자들이 예수를 믿게 되자 율법학자들,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그들은 많은 백성이 예수를 메시아로 기대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함께 야고보에게 가서 말하였다. “백성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기대하여 그를 좇음으로써 잘못된 길로 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제지하여 주십시오.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오는 모든 이들에게 예수에 관해 올바르게 권면하여 주시기를 당신에게 간청합니다. 우리는 모두 당신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모든 사람들은 당신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니 높은 곳, 당신의 모습이 뚜렷이 보이고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음성을 쉽사리 들을 수 있도록 성전의 꼭대기에 서십시오." 그렇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야고보를 성전의 꼭대기에 세우고 그에게 외쳤다. “우리가 신뢰하는 의인이여, 백성들은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를 좇아 잘못된 길로 가면서 우리에게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가 문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예수의 문이 무엇인지 알려주십시오.” 그러자 야고보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왜 당신들은 나에게 인자이신 예수에 관해 묻는 것이오. 그 분은 하늘 위,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고, 장차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오실 것입니다.” 그러자 많은 이들이 동의하며 야고보의 증언을 찬송하였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그러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서로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예수에 관한 이 증언을 허용하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러니 올라가서 그를 아래로 던집시다. 그러면 사람들이 두려워서 그를 믿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외치며 말하였다. “오! 오! 의인이 길을 잃었도다.” 이사야서에 기록된 바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들의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이는 그의 손으로 행한대로 그가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라는 말씀이 성취되었다. 그들은 올라가서 그를 아래로 떨어뜨리고 “의인 야고보를 돌로 치자.”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야고보가 아래로 떨어졌으나 아직 죽지 않았음으로 그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야고보는 몸을 돌려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 하느님 아버지, 그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돌을 던지고 있을 때 예레미야가 말한 레갑의 자손인 제사장이 소리치며 말했다. "그만 두시오. 당신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의인이 당신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때 어느 축융업자가 피륙을 두드릴때 사용하는 곤봉으로 의인의 머리를 쳤다. 그리하여 야고보는 순교하였으며 사람들은 성전에 야고보를 매장하였다. 이곳에는 아직도 그의 비석이 남아 있다. 야고보는 헬라인들과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충실히 증거한 증인이 되었다. 이 일이 있은 직후 베스파시아누스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장악하였다. >---- >― 헤게시푸스 회고록 제 5권 기독교인들은 헤게시푸스와 요세푸스의 기록이 같은 사건을 말한다고 주장하지만 그에 대한 어떠한 증거도 없으며, 이야기는 그 시기와 발생 과정, 전개, 결말까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최소한 같은 사건을 말하고 있다면 야고보 처형의 원흉인 아나누스 정도는 언급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아나누스는 커녕 기독교 전설에서 야고보를 죽이는데 앞장서는 것은 바리새인들인 반면, 아나누스는 바리새인들과 대립 관계였던 사두가이파였다. 5) 보통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라는 비기독교인 입장에서의 표현은 진실함에 대한 근거로 제시되곤 한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기독교들이 가장 먼저 사용한 표현이며(마태복음 1장 16절, 27장 17절, 27장 22절, 요한복음 4장 25절)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인 입장에서 서술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마태복음 27장 17절,27장 22절)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것은 기독교인들에게서만 발견되는 일종의 관용어이다. 유대인 고대사 외에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라는 문장이 사용된 다른 고대의 비기독교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음은 이 문단에 대한 의혹을 반박하는 내용이다. 1) 기록인용 시기가 늦었던 것은 이유가 있다. 초기교회와 비기독교도 사이의 논쟁의 초점은 '예수가 있었냐.'가 아니라 '예수가 신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3세기 요세푸스의 기록을 인용한 오리게네스가 토론한 주제 역시 예수의 신성 문제이다. 예수의 존재를 두고 논쟁하지 않았기에 이 문단은 인용할 가치가 없다. "그리스도라 불리는"이라는 대목이 예수의 신성과 그리스도를 증명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되는가? [[에우세비우스]]의 시대에 논쟁이 된 것 또한 예수의 존재가 아니라 예수가 성부와 동일실체인가였고, 이는 주류 신학계와 멱살을 잡던 떠오른 신흥세력 아리우스파에 대한 논란이다. 2) 유대고대사에 등장하는 예수라는 동명이인은 총 13명이다. 당장 인용문 자체에도, 신임 대제사장의 이름이 예수이다. 당시의 어법은 인물의 이름 앞에 그를 특정할 수 있는 지역이나 가족을 소개하는 경우가 많았다. 야고보를 소개할 수 있는 가장 대중적이고 확실한 방법은 유명인사인 예수의 이름으로 수식하는 것이었고, 동명이인의 예수 중 나사렛 예수를 수식하기 가장 보편적인 수식어는 '그리스도'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란 단어는 기독교 이전부터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서기 1세기 중반에 이르면 예수를 지칭하는 고유명사로서 자리잡게 되며 유대교도들이 이에 대해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다.] 따라서 "그리스도라 불리는"이 기독교도가 비기독교인을 위장하고자 쓰는 표현이라는 주장은 너무나 웃긴데, 애초에 그리스도란 호칭에 의미를 두는 것은 유대인밖에 없다. 때문에 유대인이 아닌 비기독교인이 예수를 부를 땐 모두들 거리낌 없이 그리스도라고 불렀다. 당장 타키투스가 그의 연대기에서 예수와 그 추종자들을 뭐라고 불렀는지 상기해보자. 때문에 "그리스도라 불리는"이라고 적은 비기독교 자료를 찾는 것은 너무나 우스꽝스러운 행동이 된다. 기독교인이 '그리스도' 부분을 가필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형제' 혹은 '그리스도의 형제'라는 형태의 문장이여야 한다. 유대교 지식층인 요세푸스는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메시아'라는 의미임을 당연히 알았을 테니, 이 용어를 나자렛 예수에 대한 고유수식으로 사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그리스도라 불리는"이라는 수식을 통해서, 자기자신의 생각과는 별개로 사람들 사이에서 그렇게 불린다는 건조한 사실만을 전달할 뿐이다. 3) "베스파시아누스를 메시아로 인정한 요세푸스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호칭하는 것은 반역의 위험이 있기에 말이 되지 않는다"라는 주장은 애초에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될거라 예언했을 때부터 이미 심각한 반역죄의 위험을 앉고 있었다는 걸 간과한 주장이다. 당시 황제인 네로는 30대 청년이었고 베스파시아누스는 58세의 늙은이였는데, 반란이라도 일으키지 않는다면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될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건 반란 조장으로 받아들여져도 무방하다. 하지만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런 말을 한 요세푸스를 오히려 극진히 대접했다. 즉 베스파시아누스가, 또는 로마 사회가 고작 이 정도 가지고 문제 삼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던 게 요세푸스란 소리다. 4) 요세푸스는 37~100년 무렵 사람으로, 이 시기에 그리스도교 외부에 있는 사람이 예수의 자세한 행적을 잘 모름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밀라노 칙령 이전까지, 교회 공동체 밖에서는 그리스도교에 관한 인식은 매우 단편적이고 부정확했다. 이를테면 법률가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미누키우스 펠릭스(Minucius Felix)는 3세기 초에 저술한 저작에서 당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비방을 듣는지 소개했다. >그리스도인들은 비밀 신호와 표시로 서로를 알아봤다. ······ 내가 듣기로 그들은 터무니없이 무지한 자들의 생각에 따라 가장 천한 동물인 당나귀의 머리를 신성시하고 숭배한다. ······ 신참자들의 입교의식 이야기는 잘 알려진 만큼이나 역겹기도 하다.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 입교자를 속이기 위해서 갓난아기를 반죽에 싸서 성스러운 의식에 임하는 사람의 옆에 놓는다. 새로 입교한 사람은 반죽 표면을 세게 내려치도록 부추겨진다. 죄 없는 행위로 보이지만, 이렇게 해서 갓난아기는 살해되고 만다. 이런 잔학행위를! 그들은 그 피를 덥석 받아 마시고 사지를 찢어발긴다. >---- >― Christopher Kelly, 「The Roman Empire」에서 간접 인용. 즉 당대 로마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당나귀 머리를 숭배한다고 여기고 성체성사를 영아 살해로 오인했다. 이런 것이 교회 공동체 밖에서 바라보는 그리스도교였다. 이 정도로 당대에 그리스도교에 대한 정보는 (교회 밖에서는) 부정확했던 것이다. 1세기 사람인 요세푸스가 간결하게 정보를 기술했음은 이상할 게 없다. 5) 기독교 전승과 해당 기록의 불일치는 오히려 해당 기록을 요세푸스가 썼다는 반증이라 할 수 있다. 위에서 야고보에 대한 기독교만의 전승을 언급한 대표적 인물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헤게시푸스를 들고 있는데, 그중 클레멘스는 요세푸스의 기록을 처음 언급한 오리게네스의 스승이기도 하다. 만약 오리게네스가 요세푸스의 야고보 기록을 창작해 낸 거라면 자신의 스승이 언급한 기독교 전승을 기록했어야지 기독교도들이 생판 처음 듣는 소리를 창작해서 기록할 이유가 없다. >"...few have doubted the genuineness of this passage [20:200] on James" >"야고보에 대한 이 구절 [20:200]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자는 거의 없다" >---- >Louis H. Feldman,[* [[https://en.wikipedia.org/wiki/Louis_Feldman|고전학자]]] tr., Josephus, IX [xambridge, mass.:havard university press, 1965], 496 다음은 오늘날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플라비우스 증언'''이다. >이때에, 우리가 그를 한 인간이라고 불러야만 한다면 현자라고 말해야 할 예수가 있었다. 그는 믿기 어려운 공적을 행한 일꾼이었고,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들의 스승이었고, 수많은 헬라인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유대인들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기름 부음을 받은 자)였다. 본시오 빌라도가 우리 가운데서 지도자 역할을 하는 고귀한 사람들의 고소 때문에 이 사람을 십자가형에 처했을 때, 처음부터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결코 그에 대한 사랑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죽은 지 사흘 만에 생명으로 복귀된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났다. 왜냐하면 신의 예언자들이 그에 관하여 이러한 일과 또 셀 수 없는 많은 놀라운 사건들을 예언하여 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의 이름을 따라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게 된 부족들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다. >---- >― 『유대인 고대사』, Bk.16, Ch.3, 63~64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글을 신뢰하고 예수와 초기 기독교에 대한 사실적인 증거라고 보았으나, 시간이 흐른 후 이 글 속에는 가필과 의도적 변조가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기록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근거는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바리사이]]적 유대주의에 충실했던 요세푸스가 예수를 그리스도였다고 말할 가능성이 없다는 점. '''둘째''', [[오리게네스]]가 그의 글에서 요세푸스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한 점.[* 오리게네스는 요세푸스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게 야고보의 의를 증언했다면서 그를 칭찬했다.] '''셋째''', 예수에 대한 이 기록은 선행하는 구절과 이어지는 구절 사이에 아무런 연관이 없다. 이 이전 구절에서 그는 유대인들에게 닥친 재앙에 관해 말 하고 있었고, 거기서 플라비우스 증언이 나오더니 그 다음 구절에서 "이때 또 다른 재앙이 유대인들에게 닥쳤다."라는 말과 함께 플라비우스 증언을 완전히 건너뛰어 버린다. '''넷째''', 초대 교부들과 그리스도교 변증가들이 이 기록을 인용하지 않았고, 324년이 되어서야 [[에우세비우스]] 추기경이 처음으로 인용했다는 점.[* 그 기간동안 요세푸스를 언급했지만 플라비우스 증언을 언급하지 않은 인물들로는 안디옥의 테오필루스, 이레네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테르툴리아누스, 마르쿠스 미누시우스 펠릭스, 히포폴리투스, 줄리어스 아프리카누스, 오리게네스, 키프리아누스, 아나툴리아누스, 아르노비우스, 메토디우스, [[락탄티우스]] 등이 있다. 이 목록은 요세푸스를 언급한 게 확인된 기독교인들만 제시한 것이다. 요세푸스는 너무 유명했기 때문에 그 외의 다른 기독교 지도자들 역시 요세푸스를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에우세비우스는 저서 《복음적 증명》에서 >Their evidence then may be considered sufficient about our Saviour. And here it will not be inappropriate for me to make use of the evidence of the Hebrew Josephus as well >---- >그들의 증거들은 우리 구세주에 대하여 충분하다고 여겨질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내가 히브리인 요세푸스를 또한 활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 > [[http://www.tertullian.org/fathers/eusebius_de_05_book3.htm|#]] 라고 말했다는 점. 허나 전체가 가필되었다고 보기에는, 미심쩍은 부분들이 상당히 많다. '''첫째''', 문맥, 즉 글쓴이의 입장이 일관되지 않는다. '현자', '놀라운 일', '부족' 등은 비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썼다고 보이는 객관적 표현이나, '그리스도였다', '그의 진리를...' 및 '부활에 관한 확언' 등은 그리스도교 입장이다. 즉, 두 사람 이상이(요세푸스 + 기독교인) 글에 손 대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둘째''',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빌라도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 유대인의 입장이다. 이런 입장은 랍비 자료와도 일치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죽음의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지운다. '''셋째''', 오리게네스는 그의 책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요세푸스가 믿지 않았다고 했다. '예수의 기록을 찾지 못했다'라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내용이다. 초기교회 내에서 논쟁의 초점은 '예수가 있었냐.'가 아니라 '예수가 어떠한 신인가.'라는 것이었고, 예수가 정말로 신인가 하는 논쟁은 주로 기독교와 비기독교 사이에서 벌어졌다. 오리게네스 역시 예수의 '실존'보다는 예수의 '신격'에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오리게네스가 본 요세푸스의 책에는 뭐라고 기록되어 있었을까? 요세푸스와 예수를 연관지었으므로 오리게네스가 본 요세푸스의 책에는 틀림없이 예수를 언급한 구절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요세푸스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외부자의 시선에서 서술했을 테니, 오리게네스는 요세푸스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고 밝혔을 것이다. 오리게네스에 대해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한 가지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삼위일체 정립에 크게 기여한 그리스도교 호교론자였다. 예수의 신성을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알렸던 그가 그리스도교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요세푸스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지 않았다."라는 내용을 남겼음은, 반대로 누군가가 "요세푸스는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믿었다."라는 주장을 제기하였다고 유추할 수 있다. 기록으로는 남아 있지 않더라도, 당시에 요세푸스의 비그리스도교적인 기록을 두고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구분짓는 사소한 논쟁이 오갔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요세푸스가 적은 원본에 예수가 언급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넷째''', 기록인용 시기가 늦었던 것은 이유가 있다. 초기교회와 비기독교도 사이의 논쟁의 초점은 '예수가 있었냐'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신인가 아닌가'라는 것이었다. 예수의 존재를 가지고 논쟁하지 않았으므로 요세푸스가 당초에 적었을 예수에 대한 비그리스도교적 구절은 인용할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예수의 신격을 강조하기 위해 '굳이 그를 사람으로 부른다면', '그는 그리스도였다.' 및 '다시 살아났다.'라는 구절을 가필함으로써 주장자의 논거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에우세비우스의 발언 또한 예수의 '신성'에 대한 '증인'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당시에도 역사서를 가필하는 것은 비판받을 만한 행동이었으니, 이러한 내용을 순순히 떠벌릴 리가 없으므로. '''다섯째''', 기록이 왜 이리 간략한가? 먼저 당시의 역사가들은 자신의 관심 밖에 있는 인물은 과감히 기록에서 제외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요세푸스가 언급하는 [[세례자 요한]]은 필론과 사도 파울로스, 랍비문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정의의 스승[* 에세네파로 추정되는 쿰란 집단의 영적 지도자로 기록된 인물로, 예수와 비슷한 가르침을 전한 내용이 쿰란 문서에 나온다.]은 쿰란문서에만 나오고, 힐렐학파의 창시자인 랍비 힐렐[* 예수보다 약간 앞선 시기에 활동했던 학자. 높은 가르침과 인자한 태도로 인해 존경받았다.]도 역시 바리사이파였던 요세푸스가 언급하지 않았다. 역시 디오 카시우스는 유대의 반로마 저항운동을 기록한 내용에서 [[제3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자칭 메시아였던 지도자 [[바르 코크바]]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지나쳤다. 요세푸스는 유대의 배신자였다. 66-74년 유대-로마간의 전쟁에서 패하자 다른 동료들은 자살했지만, 요세푸스는 항복하여 로마의 옹호자가 되었다. 자기 책을 통해 변명을 할 필요도 있었으므로, 요세푸스는 유대-로마간 항쟁에 유달리 관심이 많아서 《유대전쟁사》를 쓰기도 하였다. 세례자 요한은 헤롯의 결혼 문제로 시비를 걸기까지 하는 등 로마에게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였기에 요세푸스가 관심할 수 있었다. 또, 요세푸스는 《유대전쟁사》에서 이집트의 거짓 예언자 이야기를 썼다. 그자가 올리브산에 3만 명을 집결시켜 무장 추종 세력과 함께 예루살렘에 진입하여 로마군을 몰아내려 하다가, 펠릭스 총독에게 발각되어 현장에서 대참사가 벌어졌다는 내용이다.[* 사도행전 21:38에서 사도 바울로가 로마 천인대장에게 이 거짓 예언자로 오해받는 대목이 나온다.] 즉, 대로마 항쟁에 관심이 있었던 요세푸스에게 황제에게도 세금을 바치라고 했던,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던 예수는 관심 밖이었다. '''여섯째''', 플라비우스 증언을 좀 더 짧게 전하는 10세기 사본의 존재다. >그러나 최근에 셜로모 피네스{{{-2 Shlomo Pines}}} 교수, 그리고 여기에 동조하는 뒤바를르{{{-2 A.-M. Dubarle}}} 신부가 이른바 '플라비우스 증언'을 좀 더 짧게 전하는 10세기의 사본을 발견하여 학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시리아의 히에라폴리스의 멜키트파 주교 아가피우스가 전하는 이 이본{{{-2 異本}}}은 12세기의 시리아 사람 미카엘의 《연대기{{{-2 ''Chronique''}}}》라는[* (책 속 주석)특히 다음을 보라. a. pelletier, "l'originalité du témoignage de flavius joséphe sur jésus" in: ''recherches de science religieuse'' 52(1964), p.177-203; s. pines, ''an arabic version of the testimonium flavium and its implication'', jérusalem 1971; p. winter, "josephus on jesus and james" in: e.schürer, ''the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in the age of jesus christ''(g. vermès와 f. miller의 수정판), i, edinburgh 1973, p.428-441; a.m. dubarle, "le témoignage de josèphe sur jésus d'après la tradition indirecte" in: ''revue biblique'' 80(1973), p.481-513; a. paul은 intertestament, "cahiers évangile" 14, cerf, paris 1975, p.22-23에서 여러 가지 판본{{{-2 版本}}}을 번역해 주었다. 오리게네스에 따르면(''comment. sur matth'' 1,17; ''contre celse'' 1,47), 요세푸스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이 문제에 관한 연구 현황에 대해서는 l. h. feldman의 훌륭한 보고서를 참고할 것이다. ''josephus and modern scholarship(1937-1980), berlin, p.691-703] 책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무렵 예수라는 지혜로운 사람이 있었는데 그 행실이 착했다. 그 덕망도 모두 인정하는 터였다. 그리고 많은 유다인들과 그 밖의 다른 이방인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런데 빌라도가 그를 정죄하여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가 된 사람들이 그의 교리를 설파하였다. 그들이 말하는 바로는, 그가 부활하여 사흘 만에 자기들에게 나타났으며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는 메시아일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번역: 그는 메시아로 생각되었다.) 그분을 두고 예언자들은 여러 가지 놀라운 일들을 미리 말했다."''' 이 본문에는 그리스도인들의 가필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이 대목은 예수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호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의심을 떨치지 못했던 요세푸스 자신의 증언을 전해 준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으로 보아 요세푸스의 이 증언 역시 기원후 1세기 말경의 그리스도교 집단들 가운데서 떠돌던 소문을 이 유다인 역사가가 전해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증언 자체는 매우 간소한 편이고, 또 그 저자 역시 로마인들을 상대로 글을 쓸 때면 으레 기원후 70년의 유다 전쟁 이전에 있었던 이른바 메시아 운동들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회피하는 편이기 때문에 예수에 대해서도 그는 얼마든지 침묵을 지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가 힐렐{{{-2 Hillel}}}이나 요하난 벤 자카이{{{-2 Johanan ben Zakkaï}}} 같은 유명한 율법 학자들에 대해서도 일체 언급을 회피했던 것처럼 말이다.[* (책 속 주석)H. SCHRECKENBERG, ''Die Flavius-Josephus-Tradition'', Leiden 1972 참조.] >---- >샤를르 페로(Charles Perrot), 《예수와 역사》, 가톨릭출판사, 36-37p[* 원제: ''Jésus et lihistorie''. 위의 발췌문은 1993년(초판: 1985년)의 개정판을 번역한 것이다.굵은 글씨는 편집자가 임의로 강조.] 이 이본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가필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가필한 부분까지 인용을 해야만 주장을 전개하는 데에 유리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달랑 위의 구절만 인용한 것이다. 아가피우스가 이 자료를 어디서 구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원본에 비교적 가까운 요세푸스의 사본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인기 있는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저서는 많이 필사됐을 테니, 누군가가 가필을 했다면 로마와 그리스까지 퍼진 사본들에 모조리 가필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